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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사의방




-소재지 : 부안군 변산면 중계리 의상봉

부사의방은 변산의 최고봉인 의상봉 동쪽 절벽 중간에 있었던 암자이다. 의상봉 동쪽은 기암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곳으로 절벽아래는 천길 낭떠러지이다. 이 절벽 위에서 백척이 넘는 나무사다리를 타고 내려가면 4평쯤되는 반석이 있다. 이곳에 암자를 짓고 암벽에 쇠말뚝을 박아 매어 바람이 불어도 쓰러지지 않도록 붙들어 매었다 한다. 옛부터 이 암자에서 많은 수도승들이 도를 닦았다고 전해지는데 진표율사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이 암자에 대해 「신라의 승려 진표율사가 우거하던 곳인데 백척 높이의 사다리가 있다.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면 방장에 이를 수가 있는데 그 아래는 측량할 수 없는 골짜기이다. 쇠줄로 그 집을 매어 바위에 못질을 하였는데 세상에서는 바다의 용이 한 짓이라 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지금은 승려도 살지 않고, 암자도 없어졌지만 암벽에는 암자를 매었다는 쇠말뚝 흔적이 있으며, 4평 남짓한 반석 가장자리에는 나무 몇 그루가 옹색하게 자라고 있어 여기가 천길낭떠러지 중간의 좁은 공간이라는 사실을 잊게 되고, 바닥에는 어느 시대의 것인지는 분간할 수 없으나, 기와 조각들이 남아 있다. 사람들은 이 암자터를 [다람쥐 절터] 혹은 [ 다람이절터] 라 부르고 있다. 부사의방에서 득도했다는 신라 경덕왕때의 승려 진표율사의 행적을 삼국유사를 통해 더듬어 보면--- 「명산을 찿아 다니면서 신사 27세 상원 원래 경자에 쌀 스무말을 쪄 말려 양식으로 삼고 보안현을 찾아 변산의 부사의방에 들어갔다. 5홉을 가지고 1일을 먹고 1홉을 떼어 쥐를 기르면서 미륵상 앞에서 몸소 계법을 구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음은 고려말 이규보가 본 부사의방에 관한 기록이다.

  … 이른바 부사의방장이란 곳이 어디에 있는가를 물어서 구경하였는데, 그 높고 험함이 원효의 방보다 만 배였고, 높이 백자쯤 되는 나무사다리가 곧게 절벽  
에 걸쳐있었다. 3면이 모두 위험한 골짜기라 몸을 돌려 계단을 하나씩 딛고 내려가야만 방장에 이를 수가 있다. 한번만 헛디디면 다시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다. 나는 평소에 높이 한 길에 불과한 누대를 오를 때도 두통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정신이 아찔하여 굽어 볼 수 없었는데, 이에 이르러는 더욱 다리가 와들와들 떨려 올라가기도 전에 머리가 벌써 빙 돈다. 그러나 이 승적을 익히 들어오다가 이제 다행히 일부러 오게 되었는데, 만일 이 방장을 들어가 보지 못하고 또 진표대사의 상을 뵙지 못한다면 뒤에 반드시 후회할 것이다. 그래서 어정어정 기어 내려가는데 발은 오히려 사다리에 있으면서도 금방 떨어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드디어 들어가서 부싯돌을 쳐서 불을 만들어 향을 피우고 율사의 진용에 예배하였다. 율사는 이름이 진표이며 벽골군 대정촌 사람이다. 그는 12살 때 현계산(의상봉) 부사의방에 와서 거쳐하였는데 현계산이 바로 이산이다. 그는 명심하고 가만히 앉자 미륵보살과 지장보살을 보고자 하였으나, 며칠이 지나도록 보이지 않자, 이에 몸을 절벽에 던졌는데, 두 명의 청의동자가 손으로 받으면서 말하기를 "대사의 법력이 약하기 때문에 두 성인이 보이지 않습니다."하였다. 그래서 그는 더욱 노력하여 삼칠일에 이르니, 바위 앞 나무위에 미륵보살과 지장보살이 현신하여 계를 주고 미륵보살은 친히 점찰경 2권을 주고, 아울러 1백 99생( )을 주어 중생을 인도하는 도구로 삼게 하였다. 그 방장은 쇠줄이 바위에 박혀 있기 때문에 기울어지지 않는데 세속에 전하기를 바다의 용이 그렇게 한 것이라 한다.…


-참고문헌·이규보의 삶과 문학(홍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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