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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구병] 고산 정진석 선생님


서실에서, 고산 정진석 선생


눈빛이 소년처럼 맑고 따뜻해서 기억에 남는
윤구병/변산공동체학교


백산고등학교에는 시골학교 치고 교육 민주화에 관심이 큰 선생님들이 많다. 전국 교직원노동조합이 합법화되기 전에 전교조에서 활동한 선생님이 유난히 많았을 뿐더러 그분들의 활동이 만만찮았던 학교인데 그분들 가운데 학교에서 그 운동을 빌미로 쫓겨났던 분은 하나도 없다. 사립학교이고 교육청에서 전교조에 가입한 교사는 이유를 불문하고 다 짜르라고 서슬 퍼렇게 으르대던 시절에도 백산고등학교 선생님들은 살아 남았다. 그것 뿐인가. 내가 아는 제도적 중등 교육 기관에서 이 학교만큼 학생들에게 제도의 울타리를 넘어서는 여러 가지 교육을 시키는 학교를 찾아보기 힘들다.

요즈음에는 교사들도 학부모들도 제도 교육 기관을 미덥게 여기지 않는 경향이 커져서 대안 교육에 관심이 많은데, 백산고등학교는 오래 전부터 대안 교육에 버금가는 알찬 인성 교육을 시켜온 학교다. 그래서 나는 지역 학부모들에게 내 눈에는 백산고등학교야말로 우리 나라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대안 학교이니 딴 데 눈 돌리지 말고 백산 학교에 자녀들을 보내라고 권한다.

교사들은 학교 안에서 아이들을 제대로 가르치는 데에만 신경쓰는 것 같지 않다. 지역 사회문화 문화 모임이나 시민 모임을 앞장서 끌고 나가거나 뒷바라지하는 일에도 소홀하지 않다.

그런데 이 모든 활동을 뒷받침하면서 아무도 다치지 않게 든든한 울타리 노릇을 하는 숨은 분이 계시니 그 분이 바로 정진석 선생님이다. 백산고등학교 근처에 백산이 있으니, 그리고 땅 이름이 백산이니 자연스럽게 그 이름을 땄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내게는 이 학교 이름이 심상하게 들리지 않는다. ‘앉으면 죽산, 서면 백산’의 그 ‘백산’이다. 착취와 폭정에 맞서 분연히 떨치고 함께 일어서는 동학혁명군의 기상이다.

내가 정 선생님을 뵌 것은 변산으로 농사지으러 오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전교조 모임에서 만난 선생님 한 분이 백산고등학생들에게 강연을 해달라고 부탁해서 처음에는 거절하다가 승락하고 백산학교에 갔는데 그 때 처음 뵈었다. 내 어줍잖은 이야기를 끝까지 학생들과 함께 들어주시고 점심까지 대접해주셨는데 단아한 모습에 눈빛이 소년처럼 맑고 따뜻해서 기억에 남았다.

나중에 이 어른께서 해방공간에서 민중의 편에 서서 치열하게 싸우셨던 이야기, 그리고 그 때문인 외세와 억압자들에 맞서서 민중의 자식들을 지키려는 뜻을 끝까지 꿋꿋하게 지키고 계시다는 이야기를 귀로 듣고 내 눈으로도 보았다.

우리 불운한 분단 역사 때문에, 그리고 이승만 정권 이래로 역대 독재 정권들이 외세와 짜고 들어 친미 자본 편이 아닌 모든 사상과 운동을 용공 좌경으로 몰고 가는 바람에 ‘남로당’하면 빨갱이 가운데 상빨갱이 집단으로 치부되어왔고 지금도 그 빨간색 덧칠이 두껍게 칠해져 있는 터이나, 일본 제국주의 사슬에서 풀려나 민중이 주인되는 세상을 꿈꾼 진보 지식인이나 젊은이 치고 삼팔 이남에서 ‘남로당’에 들지 않은 이가 드물었다. 그 격동하는 운동 공간에서 내 힘으로 내 나라를 세우자는 뜻이 굳은 정진석 선생님도 자연스럽게 남로당 면당 책임자가 되고 변산에 입산하는 험로를 걸으셨던 것으로 안다.

언젠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부터 천주교를 지탱하는 힘은 로마 교황청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막 수도원에서 고행하는 가난한 수도사의 삶에서 나온다고 들은 적이 있다. 이 땅 어느 산 어느 골 어느 들녘인들 의롭게 살려다 죽어간 이들의 피에 뿌리 적시지 않은 풀과 나무가 몇 그루나 되랴.

  정진석 선생님은 누구보다 이 힘의 근원을 투철하게 꿰뚫어보는 분이다. 나는 정 선생님이 허영철 선생님을 대하는 태도에서 이 분의 인품을 본다. 옛 동지이자 선배인 허 선생님은 장기수로 출옥하여 아파트 지켜주는 허드렛 일을 하면서 생계유지를 하셨는데, 정 선생님과 허 선생님의 친교 관계를 곁에서 지켜보노라면, 정 선생님의 깍듯함과 허 선생님의 의연함에서 참된 동지애가 어떻게 움트고 지속되는지 보는 듯하여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글쓴이 :   부안21  
작성일 : 2003년 06월 29일 04시 27분 33초    조회 : 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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